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을 달리면 케임브리지가 나온다.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푸른 풀밭과 칠면조 농장들인 모인 시골 같지만 글로벌 반도체 설계 생태계의 최정점에 위치한 Arm의 본사가 위치한 탓에 기술 전쟁의 핵심 전장으로 불린다. 미국 나스닥시장 '대장주' 애플은 물론 엔비디아의 슈퍼 칩인 '그레이스 호퍼'와 차세대 칩인 '블랙웰'도 Arm 없인 설계할 수 없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Arm 본사는 1층의 길게 뻗은 중앙홀을 중심으로 3층까지 뚫려 있어 개방감을 극대화한 내부가 인상적이었다. 기자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30분. 본사를 투어하던 중 요리 냄새가 났다. 영국인들이 즐겨 먹는 '커드(Cod·대구)&칩스'였다. 그리센스웨이트 부사장은 "점심도 못먹고 인터뷰를 하러 왔다"고 농담을 던졌다.



Arm에는 구내 식당이 없다. 스낵바에서 도시락과 음료를 들고와 중앙홀에 모여 식사한다. 이들은 식사 중에도 토론을 멈추지 않는다. 본사 2000여명의 직원들이 웅성거리며 뿜어내는 설계 아이디어의 향연이 공간을 가득 메워 마치 스포츠 경기장에 온 듯 했다. 한 엔지니어는 포크질을 하다 설계 구조를 스마트보드에 그려가며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이를 반박하다 말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도시락을 들고 나가는 이도 있었다. 영국 의회 토론 형식인 'BP 디베이트'가 Arm에서도 작동했다. 폴 윌리엄슨 Arm 수석 부사장은 "창의적인 IP는 공학 지식보다 대화를 통한 인문학적 소양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2층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Arm의 심장인 '페이턴트월'(특허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Arm의 핵심 특허만 모아 전시한 공간에 오자 설계 강국인 영국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리센스웨이트 부사장은 "인류 문명의 기틀을 다진 IP 용광로"라며 "전세계에서 모여든 설계 천재들이 자신의 이름을 이곳에 새기기 위해 치열하게 연구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Arm 보유한 특허는 지난해 기준 6800건, 출원 대기 중인 특허는 2700건에 달한다. 설계 기업 중 가장 많은 IP를 보유했다는 사실보다 특허의 질이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자부심이 크다고 그는 강조했다.
Arm이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다. Arm의 전신인 아콘컴퓨터는 1978년 케임브리지에서 설립됐다. 아콘의 'BBC 마이크로 컴퓨터'는 1980년대 영국에서 교육용으로 널리 보급된 국민 컴퓨터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아콘은 사업용 컴퓨터를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당시 애플컴퓨터(현 애플)와 VLSI테크놀로지(현 NXP)는 아콘의 기술을 알아보고 1990년 아콘과 합작 회사인 Arm을 설립했다.
초기 멤버는 제이미 어쿼트, 마이크 뮬러, 튜더 브라운, 리 스미스 등 12인이다. 좁은 칠면조 헛간에 사무실을 마련한 이들은 중앙처리장치(CPU)에 개발에 나섰지만 이 분야에는 인텔이 버티고 있었다. Arm 창립 멤버들은 인텔의 '고성능' 설계보다 '저전력'에 미래가 있다고 보고 자신들 만의 방식인 'RISC' 기반 아키텍처를 개발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Acorn RISC Machine', 줄여서 'Arm'이다.



Arm을 이해하려면 반도체 설계의 핵심인 '명령어 집합 아키텍처 세트'(ISA)를 알아야 한다. ISA는 CISC, RISC 두 갈래로 나뉜다. 약자는 각각 'Complex(복잡한)·Instruction Set Computing', 'Reduced(축소한)'이다. 인텔의 CISC인 'x86'은 ISA가 1500개나 되기 때문에 고성능을 자랑해 컴퓨터나 전자기기에 많이 쓰였다. CISC는 전력을 많이 소비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과거엔 전기를 많이 먹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PC를 콘센트에 꽂아 사용해서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전력비가 설계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Arm은 CISC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적은 수의 ISA를 수행하도록 RISC를 설계했다. RISC의 ISA는 200개에 불과해 전력 소모가 적다. 덕분에 배터리 사이즈가 줄어 노키아의 휴대전화 혁명이 가능했고, 애플 아이폰이 촉발한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다. 애플이 IT 업계의 역사를 바꾼 사건에서도 RISC는 핵심 역할을 했다. 아이폰은 RISC 기반 칩을 사용했고 맥북은 CISC 기반의 인텔 칩을 사용했다. 두 디바이스 간 충돌 문제를 애플의 'iOS'로 버텨왔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이에 애플은 RISC를 기반으로 아이폰, 맥북 통합 칩 개발에 역량을 쏟았고 2020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M1 칩'을 내놨다.
이후 소프트뱅크는 수익을 높이기 위해 Arm에 자체 반도체 제작을 요구했다. 하지만 Arm은 IP 기업 정체성을 지키려 사업모델을 고수했다. 소프트뱅크는 2020년 7월 Arm 인수 4년 만에 매각을 추진했다. 이때 기다렸다는 듯 Arm을 인수하겠다고 나타난 이가 젠슨 황 엔비디아 CEO다. 엔비디아는 Arm의 설계도를 사용하기 위해 매년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했다. Arm 인수가 비용 절감은 물론 AI 시대 준비를 위한 원천 IP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황 CEO가 베팅한 금액은 무려 400억 달러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반도체 업체들이 극렬히 반대했다.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가 깨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 영국, 유럽연합(EU), 중국 등 규제당국도 거래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엔비디아는 Arm 인수를 포기했다. 황 CEO는 인수가 좌절된 후 "Arm이 앞으로 가장 중요한 CPU 설계자가 될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헛간서 출발하고 황 CEO와 손 회장 양쪽서 러브콜을 받은 Arm의 혁신은 아직 끝이 아니다. 엄청난 전기를 빨아들이는 인공지능(AI) 시대의 데이터센터 설계에도 저전력이 중요해서다. 엔비디아가 앞으로도 Arm을 가장 중요한 협력사로 여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리센스웨이트 부사장은 "엔비디아, 애플, 테슬라 등 최고 빅테크들이 Arm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며 "Arm이 사라진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투자를 해야만 현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케임브리지=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