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급물살을 탈 것 같던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이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습니다. 지난달 튀르키예에서 열릴 예정이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상 간의 평화회담이 취소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 뒤 휴전 중재에서 한발 물러설 수 있다고 태도를 바꿨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의 국방비 지출을 GDP의 5%로 증액하도록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달 열리는 NATO 정상회담에서는 유럽의 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새로운 협약이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와 같은 유럽연합(EU)의 재무장은 유럽 방산 기업들에게 큰 호재로 여겨졌습니다. 독일 라인메탈, 프랑스 탈레스,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영국 BAE시스템스 등은 올해 초부터 큰 폭으로 주가가 올랐습니다.
최근에는 이들 기업 중에서 유독 BAE시스템스를 더 웃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영국과 EU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5년 만에 관계 재설정에 합의한 것입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등은 지난달 19일(현지시간) 런던에서 정상회담을 열었습니다. 양측은 안보·방위부터 식품, 조업권, 에너지, 이민까지 넓은 분야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에 합의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지정학적 위험이 커지고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 등으로 유럽의 안보와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안보·방위 협정으로 EU의 1천500억 유로(약 240조원)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에 영국과 BAE시스템스가 동참할 길이 열린 것입니다.

BAE시스템스는 전투기부터 장갑차, 함정, 잠수함, 사이버 방어체계까지 만드는 유럽 최대 종합 방산기업입니다.
매출 기준으로 세계 7위입니다. 상위 10곳은 BAE시스템스를 제외하고 모두 미국과 중국 업체들입니다.
BAE시스템스에는 미국,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등에서 일하는 10만7400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전자시스템, 플랫폼·서비스, 항공, 해양, 사이버·정보가 5대 핵심 사업 분야입니다.

BAE시스템스의 역사는 1913년에 설립된 항공기 업체 수퍼마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퍼마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의 전투기인 스핏파이어를 만든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회사는 빅커스-암스트롱스에 인수됐다가 1960년에 브리티시 에어크래프트 코퍼레이션(BAC)으로 합쳐졌습니다.
빅커스-암스트롱스는 항공모함을 만드는 등 영국 해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회사입니다. BAC는 초음속 항공기 콩코드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BAC는 이후 다른 회사와의 병합을 거친 뒤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Ae)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글로벌 방산 기업의 합병 바람 속에서 1999년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GEC)의 군함, 방위 전자 부문과 합치며 BAE시스템스로 재탄생했습니다.

BAE시스템스는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합작 전투기인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생산합니다. 높은 제작비용과 유지비로 당초 계획만큼 많이 생산되지는 않았지만, 유럽의 하늘을 지키는 주력 기종 중의 하나입니다. 현재는 일본, 이탈리아와 합작으로 후속 기종인 ‘템페스트’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BAE시스템스는 핵 추진 잠수함도 만듭니다. 일각에서는 이 회사가 핵무기 개발과도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도 말합니다.
놀라운 점은 BAE시스템스의 미국 사업 수주가 영국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작년 기준으로 미국 44%, 영국 26%, 사우디아라비아 10% 순이었습니다. BAE시스템스의 미국 법인은 미국 국방부로부터 장갑차, 전자장비부터 군함 수리까지 수주하며 사실상 미국 기업처럼 독립적인 경영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된 BAE시스템스의 주가는 지난 29일 18.99파운드에 마감됐습니다. 올해 들어 64.71% 올랐습니다. JP모간은 최근 투자 의견을 ‘비중 확대’로 유지하며 목표 주가를 18파운드에서 18.50파운드로 높였습니다.
글로벌 투자은행 번스타인은 “전쟁의 방향이 불확실하지만, 국방비는 늘어나는 추세이고 결국 주문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며 “유럽이 방위비 지출을 본국으로 이전함에 따라 지역 예산 변동에 더욱 민감한 유럽 업체들은 그 영향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분석합니다.
최종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