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얘들아, 여기 추잡한 늙다리가 있어! 얼른 이리 와 봐.”
“뭐야, 이 녀석. 큰아버지한테 말버릇이 도대체 그게 뭐냐. 잠깐,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나는 이제 당신 조카가 아니야. 주님의 신성한 병사란 말이야. 당신 집에 더러운 알몸 그림들이 있는 걸 알아, 이 지옥에서 천벌 받을 놈아. 전부 내놔. 움직이면 채찍으로 때려주겠어!”
집집마다 소년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아직 앳된 그들은 책과 예술작품을 빼앗고 저항하는 사람을 가차 없이 때렸습니다. 중국의 ‘흑역사’인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의 만행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성과 예술이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낳은 서양 문화의 중심지 피렌체에서 1497년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압수된 물건들은 광장으로 옮겨졌습니다. 높이 10미터가 넘는 나무 탑이 세워졌고, 그 속에 거장들의 그림을 비롯한 예술 작품들이 쌓였습니다. 누군가가 여기에 불을 붙이자 진홍빛의 불길은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탑이 무너졌습니다. 그 광경을 보며 누군가는 웃었고, 다른 누군가는 환호하며 손뼉을 쳤습니다.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중에서는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도 있었습니다. 미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로 손꼽히는 르네상스 시대의 명작,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그 화가였습니다.

우리가 ‘문화의 황금기’로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 그 시대는 어떻게 찾아왔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예술작품들은 왜 불태워져야 했을까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인 보티첼리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그 시대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두 그림 사이에 있었던 변화가 바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14세기 르네상스 이전까지 서양 사람들은 신(神),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 종교적인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를 맞아 사람들은 현실에 있는 인간의 몸, 자연, 감정 같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완전히 바뀐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이나 신념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정치 얘기를 해봤다면 잘 아시겠지요. 그럼 어떻게 갑자기 사람들의 세상을 보는 시각이 한꺼번에 바뀔 수 있었을까. 간단하게 핵심만 말하면, 인구의 절반이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4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돌았습니다. 전염성이 매우 높으면서도 치명적인 이 병 때문에 유럽 인구의 절반가량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습니다. 많게는 인구의 80~90%가 사망한 도시도 있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나는 평생 신에게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딱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의 절반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부모님, 배우자, 자식, 심지어 신부님까지….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신은 왜 우리를 지켜주지 않은 걸까?” 그렇게 사람들은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한편 흑사병은 사회와 경제를 완전히 ‘리셋’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적인 측면만 보면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는 이익을 본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단 인구가 너무 줄어든 탓에 사람이 귀해졌고, 그러자 월급이 올랐습니다. 친척이 모두 죽은 탓에 유산을 받아 부자가 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반면 주인을 잃은 집이 늘면서 집값은 폭락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겹치면서 흑사병 이전 가난했던 사람 중 상당수가 중산층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러자 이들이 쓸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업, 물건을 사고팔고 돈이 오가는 상업이 발전했습니다.
그런 상공업 발전의 중심에 이탈리아반도의 도시 피렌체가 있었습니다. 피렌체는 역사 깊은 유럽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피렌체에서 만드는 화폐인 플로린(피오리노)은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달러로, 유럽의 기축통화였지요. 교황은 성당을 지을 때 플로린을 썼고, 프랑스 왕은 용병에게 플로린으로 월급을 줬습니다. 베네치아 상인들조차 향신료를 거래할 때 플로린을 썼습니다. 이런 금융업의 핵심은 바로 피렌체의 메디치 은행. 메디치 가문이 소유한 은행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교황 세 명과 프랑스 왕비 두 명을 배출한 유럽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들은 늘 겸손하고 검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다만 딱 한 가지 검소하지 않은 게 있었으니, 예술에 대한 씀씀이였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수없이 많은 작품을 의뢰하고, 사들이고, 예술가를 후원했습니다. 미술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의 후원 덕분에 르네상스 예술은 피렌체에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보티첼리는 1445년쯤 가죽 가공 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르네상스 초기에 그려진 걸작들을 보며 그 성과를 흡수했습니다. 회화 역사상 처음으로 ‘체계적인 원근법’을 적용한 마사초(1401~1428)의 그림이 대표적입니다.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인다는 것쯤은 마사초 이전의 사람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 하지만 마사초처럼 체계적이고 수학적으로 비율을 계산해 이를 그림에 적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사초 이후 이런 원근법은 서양 미술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맨 처음 보티첼리는 금 세공사가 되는 훈련을 받았지만, 수련을 마친 뒤 당시 유명 화가(프라 필리포 리피)의 공방에 들어가 화가 훈련을 다시 받습니다. 화가로 진로를 바꾼 겁니다. 아마도 화가가 더 유망하고 돈을 잘 번다는 판단에서였겠지요. 결과적으로 이런 판단은 정답이었습니다. 20대 중반인 1470년쯤 화가 작업실을 연 보티첼리에게 그림 의뢰가 쏟아져 들어왔거든요. 메디치 가문과의 본격적인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30대 중반인 1480년 무렵, 보티첼리의 이름은 피렌체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보티첼리가 교황청의 의뢰를 받아 로마로 떠났습니다. 로마에서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 벽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후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게 되는 그 건물입니다. 그렇게 교황청의 의뢰를 마치자마자 돌아온 보티첼리. 메디치 가문의 의뢰를 받아 또다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서양 미술사에 남은 불후의 명작,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었습니다.

일본을 대표했던 미술사학자 다카시나 슈지(전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장)은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글보다 그림 속 색(色)과 형태가 당시 분위기와 사상을 훨씬 더 잘 전해주는 시대였다”고요. 그 말대로 ‘비너스의 탄생’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전한 초기 르네상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는 바다 위 물거품에서 태어나 육지로 밀려오게 되는데, 그림은 비너스가 해변에 도착하는 그 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색과 형태가 인간의 영역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마치 르네상스라는 시대의 시작을 그림 한 장으로 표현한 듯합니다.
‘봄’도 만만찮은 걸작이자, 후배 화가인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와 보티첼리의 차이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오른쪽의 세 사람을 잘 보세요. 괴물같이 묘사된 오른쪽 바람의 신(제피로스)이 투명한 옷을 입은 가운데 님프(클로리스)를 쫓아와 붙잡는데, 그 순간 님프의 입에서 봄꽃이 흘러넘칩니다. 그리고 불안해하던 님프는 고요하게 위엄을 내뿜은 왼쪽 꽃의 여신(플로라)로 변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순간을 한 그림에 그려 넣는 방식은 르네상스 이전 중세 미술에서 흔했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화면 안에 어떤 사람이 태어나는 장면과 성장하는 장면, 죽는 장면을 나란히 배치하는 식입니다. 지금 보면 조금 이상할 수 있지만, 중세 사람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여겼습니다. 미술을 볼 때 그 교훈과 상징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르네상스 이후 그림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순간을 포착해 그립니다. 이런 점에서 보티첼리의 작품은 르네상스 이전 미술의 요소를 여전히 담고 있습니다.
반면 보티첼리의 화풍 자체는 르네상스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보티첼리의 작품에서는 중세의 상징성과 르네상스의 감각이 절묘하게 공존합니다. 이처럼 보티첼리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펼쳐진 초기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화가였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도 마냥 행복한 건 아니었습니다. 경제는 번창했고 도시 곳곳에서 아름다운 작품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 또다시 흑사병이 돌지 모른다는 불안,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길한 징조나 미신적인 요소에도 쉽게 흔들렸습니다. 그중 하나가 종말론. 쉽게 말해 ‘세상이 곧 망할 것 같다’, 나아가 ‘세상이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찾아온다’는 건데요. 20세기 후반인 1990년대 휴거 소동 같은 종말론이 유행했듯이, 인간은 옛날부터 날짜 기준이 바뀔 무렵 불안감을 느끼곤 하니까요.
피렌체에서는 1480년대부터 이런 종말론적 분위기가 강해졌습니다. 특히 1492년 지도자였던 로렌초가 죽고, 그의 무능한 아들이 정권을 계승했다가 권력을 잃고, 프랑스의 침공 앞에 피렌체가 항복하면서 이런 분위기는 더욱 강화됐습니다. 그 틈을 파고들어 온 게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였습니다.
그는 “종말이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사회 지도층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은 그의 말에 압도됐고, 도시 전체가 급격히 종교적인 열광 분위기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과정에서 화려했던 르네상스 예술은 ‘허영’으로 낙인찍혔습니다. 사보나롤라가 이렇게 말했거든요. “저속하고 추잡한 그림, 음악, 연애, 시는 영혼을 악(惡)으로 이끈다. 특히 젊은 여자가 있는 집에는 알몸을 그린 회화를 둬서는 안 된다!”
사보나롤라가 만들어낸 집단적 광기가 터져 나온 사건이 바로 ‘허영의 소각’이었습니다. 1497년과 1498년 도시 광장에 장작과 함께 여러 예술 작품들을 쌓아 올리고 이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었지요. 첫 부분에 썼던 것처럼, 피렌체의 소년들은 마치 훗날의 홍위병처럼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작품과 책을 수거해 왔습니다. 물론 자기 손으로 직접 ‘퇴폐적 작품’을 불길에 던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걸작이 잿더미가 됐다고 합니다. 정말 아까운 일입니다.


보티첼리도 이런 사태에 휘말렸습니다. 보티첼리가 자기 작품도 함께 불태웠는지 여부는 기록돼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사상에 공감했고, 큰 영향을 받았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사보나롤라를 만난 1490년대 들어 그의 작품이 확 바뀌었거든요. 이 시기 이후 보티첼리 작품의 절대다수는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고, 화풍도 중세에 가까워집니다. 여러 작품을 보면 그가 사실적이고 조화로운 구도를 버리고 종교적인 의미를 중점적으로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물론 이런 광기가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끼던 아름다운 작품들을 불태우며 생각했습니다. ‘이게 정말 맞나?’ 그리고 사보나롤라는 두 번째 허영의 소각이 있었던 1498년, 거짓 예언자로 심판을 받아 구경꾼들 앞에서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허영의 소각이 있었던 바로 그 광장에서였습니다.

르네상스라는 사상과 시대도 변화를 겪게 됩니다. 피렌체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르네상스의 중심지는 피렌체에서 로마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르네상스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경쟁을 통해 최전성기를 맞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사망(1520년) 이후 르네상스 양식은 점점 해체되기 시작하고, 결국 수십 년 뒤에는 서양미술의 대세가 바로크로 바뀌고 맙니다.

추방당했던 메디치 가문은 훗날 피렌체의 지배자로 복귀합니다. 메디치 가문이 남긴 건축과 작품들을 보고 그들을 추억하는 시민들 덕분이었습니다. 문화에 아낌없이 투자했던 게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겁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피렌체의 국력은 점차 약해졌고, 이에 따라 메디치 가문도 쇠락해 갔습니다. 그리고 1743년,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가 자식 없이 죽으며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가문의 미술품을 모두 피렌체에 기증하노라.” 그렇게 메디치라는 이름은 역사가 됐습니다.
그 후 한참 동안 르네상스와 메디치 가문의 역사, 보티첼리라는 이름은 역사의 구석에 묻혀 있었습니다. 1815년 ‘비너스의 탄생’이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대중에 처음으로 공개됐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게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피렌체 사람들조차 ‘비너스의 탄생’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아서, 작품이 걸린 위치도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1862년 프랑스의 작가(레옹 라그랑주)가 “피렌체 사람들이 보티첼리를 복도에 버렸다”고 한탄할 정도로요.
하지만 점차 분위기가 바뀝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서양사 학계는 르네상스 시대를 본격적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했고, 르네상스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메디치 가문의 역사도 다시 주목받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티첼리라는 이름의 중요성도 서서히 알려지게 됩니다. 1930년 런던에서 있었던 ‘이탈리아 미술 전시회’는 보티첼리라는 이름을 다시 세계 미술사에 각인시키는 계기였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비너스의 탄생’은 수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고, 이후 수없이 복제되고 다뤄지며 여성의 아름다움과 르네상스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보티첼리와 르네상스 이야기를 공부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살다 보면 때로 세상이 갑자기 확 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르네상스의 초입이 그랬듯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아질 것처럼 보일 수도, 사보나롤라의 종말론처럼 갑자기 세상이 망할 거라는 확신에 사로잡힐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실 그런 일들은, 지나고 나면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을 때가 많습니다. 꽃이 지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숲의 생명은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계절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초록색 싹은 다시 움트는 것처럼요.
멀리서 보면 세상은 그렇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조금씩 나아갑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없이 하루를 충실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뿐입니다. 그 흐름 속에서, 진짜로 의미 있는 것들은 언젠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마련입니다. 보티첼리의 삶과 작품도 그랬습니다.
**이번 기사는 <르네상스 미술>(다카시나 슈지 지음, 이연식 옮김), <산드로 보티첼리>(바르바라 다임링 지음, 이영주 옮김) <화가들의 마스터피스>(데브라 N. 맨커프 지음, 조아라 옮김)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으로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